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3학년 때 우리 반 1등이었던 친구가 예고도 없이 물었다.
“너는 표정이 참 행복해 보인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거냐? 나도 좀 배우자.”
농담하는 줄 알았다. 20여 년 만에 만나서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래. 열심히, 하라는 대로 다 하면서 살았는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 걸까? 얼마 전부터 그게 너무 궁금했다.”
자기는 코코 아빠라고 했다. 퇴근해 집에 들어가면 반겨주는 건 애완견 한 마리밖에 없다고 했다.
태어나서 오로지 1등만 했던 인생이지만 여전히 모르겠다는 행복.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되니까 일단 공부와 성공에 매달리라’고 등을 떠미는 세상 탓이 크다.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배워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을 주제로 진지하게 토론을 해본 적도 없다. 행복을 알지도 못하면서 행복을 획득하려고만 한다.
1등 친구에게 물었다.
“행복해진다고? 그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는데?”
친구는 뭔가를 이루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힘들게 성취했으니까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고, 좋은 직장을 잡았으며, 내 집을 장만했다. 좋은 자동차를 구입했으며, 딸을 하나 낳았다. 남부럽지 않은 삶.
그래도 행복하진 않았다.
1등 친구의 착각이다. ‘행복은 무언가를 해서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1등을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인 것이다. 또한 행복은 ‘지속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진다’는 말 자체가 엄밀하게 보면 어불성설이다.
사람들은 노력을 통해 행복을 획득하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가장 효율적으로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비법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행복에서 멀어진다. 그토록 원했던 사랑도, 좋은 집도, 드림 카도, 정작 얻고 보면 ‘그냥 일상 중 하나’일 뿐이다. 행복한 상태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허하기까지 하다.
행복, 즉 ‘happiness’의 어원은 ‘일어나다 happen ’이다. 우발적 사건을 의미하는 ‘해프닝 happening ’도 같은 맥락이다. 행복은 우연에서 시작된다. 한자어 ‘행 幸 ’ 역시 ‘운이 좋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억지로 그런 우연을 만들어내려고 온갖 수단을 아끼지 않는다.
“행복은 보상이나 성과 같은 게 아냐. 그냥 순간의 만족이나 감동 같은 느낌? 아니면 과거를 돌아보면서 뿌듯하게 느끼는 거? 그런 거야. 일시적인 거라고. 그런 행복을 24시간 또는 그 이상으로 이어갈 수 있다고 믿는 게 이상한 거지.”
그렇지만 행복감을 더 많이, 자주 느끼게 스스로를 훈련할 수는 있다.
시작은, 스스로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외로움을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외로움은 일종의 수행이다. 외로움이 감각을 단련시켜준다. 뼈저리게 외로워봐야 사람 귀한 줄 알게 된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본격적인 출발점이다.
상대방의 감정에 민감해지며 그 결과, 남을 존중하며 배려하는 것은 물론 사색과 관찰을 통해 사려 깊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외로움, 즉 론리니스가 솔리튜드로 진화하면서 기품을 만들어준다. 사람을 보는 안목을 길러주며 진정한 감사를 깨닫게 해준다. ‘나에겐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다’면서 나서는 법이 없다. 스스로와 화해하며 다른 이와 좋은 관계를 이어간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행복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훈련이다.
1등 친구가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그런데 론리니스는 뭐고, 솔리튜드는 뭐냐?”
내가 반문했다.
“네가 숲 속에 다녀왔다고 가정하자. 누가 너한테 ‘숲 속에 뭐가 있었습니까’ 하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할래?”
친구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글쎄다. 그냥 나무들이 있겠지 뭐가 있겠어.”
굳이 비유하자면 론리니스는 그런 것이다. 자기 외로움에만 급급해 세상을 돌아보지 못한다. 반면 솔리튜드는 더 많은 것을 풍부하게 보고 느낀다. 숲 속에서 나무들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을 보고, 새소리를 듣고, 바람을 느낀다. 개울 따라 흐르는 낙엽을 감상한다. 나무들이 발산하는 냄새를 맡는다.
한마디로 솔리튜드란, 더욱 풍요로운 세상을 만나는 ‘관점’ 같은 것이다. 또한 통념과 강박으로부터의 ‘자유’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마음의 부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부자들은 적당한 부와 건강, 균형 잡힌 삶으로 매일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행복을 느끼기 위해선 ‘친밀한 관계’와 ‘자신만의 의미 있는 목표’ 같은 심리적 재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마음의 부자들에게 행복이란 목표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긍정적 경험과 부정적 경험을 모두 받아들여 조화를 이룬다. 과거의 앙금에서 벗어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균형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1등 친구에게 말했다.
“행복을 자주, 그리고 많이 느낀다면 흔히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행복은 좋은 경험들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스스로가 행복한지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잣대가 있는데 들어볼래?”
그가 대답했다.
“그런 걸로 판단 안 해도, 난 지금 행복하지 않다니까.”
첫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남’의 기준으로 성공과 행복을 판단하려고 한다. 남들 다수가 선망하거나 우러러봐야만 행복한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 애를 쓰지만 목표를 이루어도 행복한 느낌 같은 것은 없다. ‘나’라는 잣대가 확고해야, 내가 좋아하는지 알 수 있고, 만족하며 행복한지 판단할 수 있다.
두번째는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하거나 그것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진심으로 격려 또는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망설일 틈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두번째 잣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손을 계속 비워놓을 수 있는지 자신한테 물어보는 거야. 양손에 떡을 쥐려고 하지 않도록 말이야. 양손에 떡을 쥐면 그 후에는 남의 떡을 노려보는 욕심밖에 더 부리겠어? 결핍을 받아들여야 인생에 발전이 있다고 해.”
이렇게 세 가지 잣대로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그렇다’면 행복과 매우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은 균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스로와, 동시에 남들과.
'지금 외롭다면 잘되고 있는 것이다' 중에서